2017.03.22
이재희 라이프부 차장, 부산일보
눈앞에 경이로운 풍경이 펼쳐졌다. 수백 수천 마리의 두루미 무리가 넓은 들판에서 꾸룩꾸룩 노래를 하며 춤을 추거나 먹이 활동을 하고 있었다. 두루미는 옛날부터 우리나라에서도 십장생의 하나로 ‘학(鶴)’으로 부르던 영물. 2월에 일본 규슈올레 이즈미 코스 개장 행사를 취재하러 갔다가 가고시마 현 이즈미 시의 아라사키[EAAF030]에 있는 두루미 관찰 센터에서 보았다.
이곳 두루미는 월동 기간인 10월 중순부터 시베리아 아무르 강 유역이나 중국 동북부에서 날아오기 시작해 다음 해 3월 말까지 지내다가 돌아간다고 한다. 기록에 따르면 1927년엔 440마리, 1936년에는 2542마리가 왔으나 태평양 전쟁 직후엔 275마리로 줄었다. 1972년에 2689마리가 왔고 매년 그 수가 증가하여 2009년에는 무려 1만 1637마리가 도래했다.
두루미는 시베리아에서 한국의 철원평야[EAAF027], 구미의 해평습지[EAAF078], 대구 달성습지 혹은 천수만[EAAF046]과 순천만[EAAF079]을 거쳐 규슈 이즈미까지 날아온다. 그런데 기록을 살펴보면 주목할 만한 지점이 있다. 종전 직후인 1947년부터 1952년까지는 200여 마리로 줄었다가 1970년대부터 기하급수적으로 늘어 10년 후인 1982년에는 7055마리나 왔다.
70년대는 한국에서 산업화가 진행되던 시기라 그 여파가 아닌지 조심스레 짐작해 본다. 공단이 들어서고, 강 주변이 개발되고 들판에 비닐하우스가 들어서면서 한국에서의 월동이 위태로워졌기에 기를 쓰고 더 안전한 일본으로 날아온 것일까.
물론 일본에서도 두루미의 삶이 그리 순탄하지는 않았다. 이즈미 평야에 두루미가 모여들기 시작한 것은 에도시대(17세기 초~19세기 말)로 당시 두루미는 에도막부와 쓰시마번에 의해 보호받았다. 하지만 19세기 중반 메이지유신 이후 서구 문물 도입으로 사냥이 유행하면서 두루미 수가 급감했다. 두루미가 멸절 위기에 처하자 환경론자의 발의로 두루미 포획 금지법이 생기고 1921년 두루미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면서 먹이를 주는 등 보호 활동이 본격화되었다.
일본 환경청은 이즈미 평야 일대 842㏊를 조수보호구로 지정했고, 이 중 54㏊를 특별보호지구로 선포했다. 보호구의 논 104㏊는 농민들에게 비용을 지급하고 임차를 해서 두루미를 보호한다. 두루미가 떠나는 3월까지 감시원들이 벼와 보리 등 먹이를 주고 있다. 일부 논에는 물을 대 인공습지를 만들고, 농로 옆에는 사람 키 높이의 검은 천을 둘러 두루미들이 놀라지 않게 한다.
그 결과 전 세계의 조류학자는 물론, 수만 명의 관광객이 겨울이면 이곳 이즈미 시를 찾는다. 한적한 시골 도시지만, 두루미로 인해 북적대는 것이다. 부러우면서도 안타까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낙동강 에코트레일 취재를 하며 본 해평습지는 더는 두루미에게 안전한 곳이 아니었고, 달성습지도 망가졌다.
일본 환경 당국은 전 세계 흑두루미의 90%, 전 세계 재두루미의 절반에 가까운 개체가 이즈미 평야에 밀집하는 것을 오히려 걱정하고 있다. AI라도 번지면 큰일이라는 것이다. 소중한 두루미 자원의 보호를 위해서라도 보를 만들며 망가진 한국의 습지가 빨리 옛 모습을 되찾았으면 좋겠다.
출처 : http://news20.busan.com/controller/newsController.jsp?newsId=20170320000308#n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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